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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칼리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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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칼리파국
الدولة الفاطمية

 

909년~1171년
969년경의 영토
969년경의 영토
수도마디아(909년 ~ 948년)
알만수리야(948년 ~ 973년)
카이로(973년 ~ 1171년)
정치
정치체제칼리파국
칼리파
909년 ~ 934년
1160년 ~ 1171년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흐
알 아지드
인문
공용어고전 아랍어, 베르베르어
민족아랍인, 콥트인, 베르베르인
경제
통화디나르
종교
국교시아파 이슬람교
기타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아바스 칼리파국
아글라브 토후국
아이유브 술탄국
무라비트 술탄국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지리드 토후국
시칠리아 토후국
시칠리아 백국
파티마 칼리파국의 영토 변화

파티마 칼리파국, 또는 파티마 제국(아랍어: ٱلْخِلَافَة ٱلْفَاطِمِيَّة, 로마자: al-Khilāfa al-Fāṭimiyya)은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약 2세기 가량 존속했던 이스마일 시아파파티마 왕조의 통치 하에 있던 아랍 제국이자 칼리파국이었다. 그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대서양 연안의 모로코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홍해까지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아울렀다. 파티마 왕조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시아파 초대 이맘 알리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으로 여겼으며, 실제로 많은 시아파 공동체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슬람 국가들 및 인접한 지역의 교파들에게 정당한 이맘으로 인정받았다.[1][2] 처음에 이프리키야(대략 오늘날의 튀니지)에서 창건된 파티마 왕조는 곧 그들의 통치를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집트로 확장시켰다. 파티마 칼리파는 핵심 지역인 이집트 이외에도 마그레브, 시칠리아, 레반트, 헤자즈 등의 영토를 통치했다.

902년에서 909년 사이에, 이스마일 시아파에게 이상적이었던 국가의 실현은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도움으로 아글라브 이프리키야를 전복시키고 파티마 칼리파국의 설립을 위한 길을 닦은 다이(선교사) 아부 압둘라 알 쉬이에 의해 이루어졌다.[3][4][5] 그곳의 정복 이후, 시질마사에 머무르고 있던 압둘라 알마흐디 빌라는 909년에 이프리키야에 도착하여 이맘으로 인정되었으며 초대 파티마 칼리파이자 왕조의 창시자가 되었다.[6][7] 969년 알 무이즈 통치 기간에 파티마 칼리파국은 이흐시드 왕조로부터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973년에 새로운 수도 카이로를 건설하면서 이집트는 파티마 칼리파국의 새로운 핵심 지역이 되었다. 이집트는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중심지가 되었으며 새로운 "고유의 아랍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8] 초기의 활발한 정복 이후, 파티마 칼리파들은 종종 유대교와 기독교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슬람의 비시아파 종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종교적인 관용을 베풀었다. 하지만, 정작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대중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신념을 채택하도록 하는 것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9][10]

알 아지즈알 하킴의 통치 이후, 알 무스탄시르의 길고도 평범했던 치세는 파티마 칼리파들이 국정에 대해 관심이 없도록 만들고 와지르 및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 정권을 확립시켰다.[11] 1060년대에는 군대 내부의 정치적, 민족적 파벌주의가 장기간의 내전으로 이어져 국가의 생존을 위협했다.[12] 와지르 바드르 알 자말리의 재임 기간 동안 부흥기를 구가하던 파티마 칼리파국은 그가 죽은 후 11세기 후반과 12세기 동안 급격히 쇠퇴했으며,[13] 1070년대 셀주크 튀르크의 시리아 침공 및 1097년 십자군의 레반트 상륙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 이외에도 여러 내부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심각할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12] 1171년, 마지막 파티마 칼리파가 사망한 뒤 명목상의 와지르였던 살라딘이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는 이미 권력을 상실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직위를 공식적으로 철폐하고는 이집트를 다시 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킨 아이유브 술탄국을 창건했다.[14][15]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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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아랍어 الدولة الفاطمية
(앗 다울라툴 파티미야, ad-dawlat-ul Fatimiya)
ٱلْخِلَافَة ٱلْفَاطِمِيَّة
(알킬라파툴 파티미야, al-khalifat-ul Fatimiya)
الفَاطِمِيُّونَ
(알파티미윤, al 'fatimiuwn)
فَاطِمِيّ
(파티미위, fāṭimiyy)
페르시아어 خلافت فاطمیان
(할로파트 파티미얀, khelaafat 'fātemīyān)
فاطمیان
(파티미얀, fātemīyān)
영어 Fatimid Caliphate
파티미드 캘러페이트
Fatimid Dynasty
파티미드 다이너스티
Fatimid Empire
파티미드 엠파이어
한자 綠衣大食
녹의대식
한국어 파티마 칼리파국
파티마 왕조
파티마 제국

파티마 왕조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시아파 초대 이맘 알리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고 여겼으며, 이를 파티마로부터 물려받은 무함마드 혈통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했다. 따라서 왕조의 공식적인 이름인 "파티미위Fāṭimiyy(아랍어: فَاطِمِيّ)"는 아랍어 "파티마Fāṭima"의 상대적 형용사이다.

그들은 또한 알리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을 '앗다울라 알 알라위야al-dawla al-alawiya, (알리 왕조)"라고 칭했지만, 대부분의 수니파 기록에서는 단지 그들 왕조의 창시자 압둘라 알마흐디 빌라의 원래 이름 중 일부인 '우바이드 알라'를 따서 "우바이드 왕조Banu Ubayd"라고 부른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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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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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리했던 것이다.[16]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16]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달라 알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랍 출신이었다.[17] 소카빌리아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4][5][6][7]

초기 시아파와 이스마일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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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아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 수니파 칼리파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18]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연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19] 이후 이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20]

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으로 놓여져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12대 이맘)가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훗날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21][22]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따서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21][23][24] 아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25]

비밀 연락망과 선교사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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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아바스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부름)"이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 비밀 연락망의 우두머리는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즉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연장자 압둘라")였다.[26]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27][28]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아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29] 함단 카르마트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예멘(882)과 인도(884), 바레인(889), 페르시아, 마그레브(893)[30][31][32]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카르마트파의 분열과 그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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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n 1]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34] 훗날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35][36]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고, 훗날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30][12]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아바스 왕조의 재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에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았다.[33][37][38]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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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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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은 명목상으로는 봉신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랍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39]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40]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41][42]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랍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뭉치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41] 이를 바탕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 네트워크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43][42]

파티미야 혁명, 그리고 아글라브 이프리키야의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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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미야 혁명의 진행 과정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에서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 산에서 카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시칠리아를 원정하는 틈을 타서 알 쉬이는 콩스탕틴 인근의 밀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했다.[44]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두 번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스파이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네트워크를 다시 구축했다.[45]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잡았으나,[46] 내전으로 지리멸렬해진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47][42] 훗날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장군은 급히 도망쳐야 했으며 쿠타마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38]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48]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아글라브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 티지스 요새를 잇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49][50]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51]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로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초텔 제리드)를 휩쓸고 투주르, 나프타, 가프사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52]

그러나 혁명이 성공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베르베르 부족들이 알 쉬이 측에 계속 합류함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반란군은 엄청난 규모로 팽창해갔던 반면에 아글라브 측은 그러지 못했다. 알 쉬이는 마침내 909년 2월 25일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익잔에서 출병하였으며[53] 그해 3월 18일에 알 아르부스 인근에서 아글라브 왕자 이브라힘 이븐 아비 알 아글라브가 이끄는 아글라브 군대와 만났다.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쿠타마 기병대가 전장을 우회하여 아글라브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반란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53] 패배 소식이 라카다에 전해지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귀중한 보물들만을 챙기고는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이에 카이로완 시민들은 버려진 라카다 궁전을 약탈하고 최후까지 저항하라는 알 아글라브의 명령에 반발을 숨기지 않았다.[54] 이 소식을 들은 알 쉬이는 3월 24일 쿠타마 선발대를 보내어 라카다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그 다음날에는 자신이 직접 당도하여 이곳을 마흐디 국가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다.[55][12]

칼리파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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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파티마 칼리파 알 마흐디 빌라불가리아 제1제국차르 시메온 1세로부터 서신을 받은 모습. 12세기 무렵에 제작된 비잔티움 역사서에서 등장함.

라카다에서 권력을 잡자, 알 쉬이는 아글라브 관료 체제의 상당 부분을 물려받았으며 전임자들의 궁정에서 일하던 관리들이 새 정권을 위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56] 그는 '주군'의 부재를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마일 시아파 정권을 설립했고, 잠시 동안만 그 정권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곧 군대를 이끌고 서쪽의 시질마사로 가서 압둘라를 영접하고 910년 1월 15일 라카다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압둘라는 자신을 '알 마흐디'의 성을 가진 칼리파로 선포하고, 그의 후계자이자 아들에게 '알 카임'의 칭호를 수여했다. [33][12] 이로써 파티마 왕조가 성립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압둘라 알 마흐디와 알 쉬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알 쉬이는 알 마흐디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우려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칼리파가 진정한 마흐디라는 증거를 요구했다. 아부 압둘라 알 쉬이와 그의 형제 및 측근들의 제거는 그를 추종하던 몇몇 쿠타마 베르베르인들이 한 아이를 새로운 마흐디로 내세워 봉기하도록 이끌었는데,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었다. [33][12]

새로운 정권은 이프리키야에서의 존재를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의 진짜 목표는 아바스 조의 수도인 바그다드였다.[33] 하지만 알 카임이 이끄는 파티마 군대의 914~915년919~921년에 걸친 연이은 이집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파티미야 혁명을 동쪽으로 전파하려는 야망은 연기되어야 했다.[12] 게다가 파티마 왕조는 아직 불안정했다.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말리키 수니파이바드파, 카와리지파와 같은 다양한 분파들을 지지했기 때문에,[33] 나중에 산하자 베르베르족에 의해 확장되기 전까지 이프리키야에서의 파티마 왕조의 실질적인 권력 기반은 상당히 좁았다. 사학자 하인츠 할름은 초기 파티마 정권을 두고 "마그레브 동부와 중부에 대한 쿠타마와 산하자 베르베르족의 헤게모니"라고 묘사한다.[12]

알 마흐디야에 있던 알 카임 궁전의 모자이크 파편 조각들. 현재 마흐디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912년, 알 마흐디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새로운 수도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요새화된 궁전 도시 알 마흐디야의 건설은 916년에 시작되었다.[12] 새로운 도시는 921년 2월 20일에 공식적으로 출범했지만, 이후에도 건설이 계속되었다.[57] 새로운 수도는 수니파 아글라브 조의 거점이었던 카이로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지역 주민들과 더 이상의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고 칼리파와 그의 쿠타마 베르베르족들을 위한 안전한 거점을 구축할 수 있도록 했다.[33][57]

시칠리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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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는 또한 827년부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서서히 정복해 온 시칠리아의 아글라브 영토를 계승했다, 이 정복은 902년 이브라힘 2세에 의해 마지막 기독교 거점이었던 타오르미나가 정복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완료되었다고 여겨지나,[58][45] 967년까지 시칠리아 북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나 동로마의 저항이 계속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남부의 영토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59][60][45][58] 이러한 이슬람 세계의 전통적인 적과의 지속적인 대립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파티마 왕조에게 선전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61] 시칠리아 자체가 문제가 되었고, 이븐 쿠르후브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파티마 칼리파의 권위는 강화되었다.[62]

통합과 서부에서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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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년 당시 코르도바 우마이야조의 영역

10세기의 대부분 동안 파티마 칼리파국은 마그레브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알안달루스를 통치하고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와도 경쟁했다.[33] 909년에 아부 압둘라 알 쉬이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던 타헤르트는 2년 뒤인 911년 미크나사 부족 출신의 파티마 장군 마살라 이븐 하부스에 의해 함락되었다.[63] 모로코 북부까지 도달한 파티마 원정은 917년과 921년에 각각 이루어졌으며, 주로 그 일대의 나쿠르 공국을 목표로 삼았고, 페스시질마사도 921년에 점령되었다. 이 두 원정은 타헤르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마살라 이븐 하부스가 이끌었다.[64][63] 그 후 쇠약해진 이드리스 왕조와 여러 지역의 제나타산하자 족장들은 상황에 따라 우마이야 왕조나 파티마 왕조 사이를 오가면서 그들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65][66] 마그레브 서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파티마 왕조의 효과적인 통제 범위는 이전의 아글라브 조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67] 마살라의 후계자인 무사 이븐 아비엘 아피야는 이드리스 조의 페스를 다시 점령했지만, 932년에 마그레브 서부를 우마이야 왕조에 바치고는 그들에게 항복해버렸다.[62] 덕분에 우마이야족은 950년대에 모로코 북부에서 다시 우위를 점했고, 파티마 장군 자우하르가 칼리파 알 무이즈 대신에 958년에 또 다른 원정을 감행하여 모로코 북부 대부분을 정복할 때까지 계속 그곳에 영향력을 미쳤다.[67] 그는 지리 왕조의 창시자인 지리 이븐 마나드와 함께 원정했다. 자우하르는 958년 9월이나 10월에 시질마사를 함락시킨 후, 지리의 도움으로 959년 11월에 페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살레, 세바, 탕헤르에 있는 우마이야 수비군을 완전히 격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브롤터 해협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이것은 파티마 군대가 그곳에 있었던 유일한 시기였다.[68] 자우하르와 지리는 960년에 알 만수리야로 귀환했다. 타헤르트를 포함한 마그레브 중부(알제리) 대부분은 지리 이븐 마나드에게 주어져 칼리파 대신 그곳을 통치하도록 했으며, 그 외의 페스와 시질마사를 포함한 모로코의 복속된 지역들은 현지 토후들의 지배 하에 놓였다.[69]

마그레브와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이 모든 일련의 전쟁들은 강력한 군대와 함대의 유지를 필요로 했다.[33] 실제로 934년 알 마흐디가 사망했을 당시, 파티마 칼리파국은 지중해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12] 제 2대 파티마 이맘-칼리파였던 알 카임의 통치 기간 대부분은 아부 야지드의 카와지리 반란으로 점철되었다. 943~944년 제나타 부족 사이에서 시작된 봉기는 이프리키야를 통해 확산되어 카이로완을 점령하고 945년 1월부터 9월까지 알 마흐디야를 포위하여 알 카임을 봉쇄했다. 비록 알 카임은 포위전 도중에 사망했지만, 이것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이스마일이 아부 야지드를 물리칠 때까지 비밀로 부쳐졌다. 이후 그는 부친의 죽음을 발표하고 자신이 새로운 이맘이자 칼리파로 등극했음을 알렸으며, 알 만수르의 칭호를 취했다.[33][12] 알 만수르가 반란의 마지막 잔재들을 제압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는 동안, 카이로완 남쪽에는 그를 위한 새로운 궁전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건설은 946년경에 시작되었고 알 만수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알 무이즈 시기에 완공되었다.[70] 이곳은 알 만수리야라고 명명되었으며 파티마 칼리파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12][70]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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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정복과 카이로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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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0~972년 사이에 파티마 왕조에 의해 지어진 카이로알 아즈하르 모스크[71]

966년, 자우하르는 아바스 왕조에 충성하면서도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이흐시드 왕조 치하의 이집트를 신중한 준비 끝에 성공적으로 침공했다.[72][73] 알 무이즈는 자우하르에게 정복 후 그곳을 안정화시키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는데, 그의 첫 행동 중 하나는 969년 알 카히라(오늘날의 카이로)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74][75] 알 카히라al-Qāhira, (아랍어: القاهرة‎)라는 이름은 "정복자" 또는 "승리자", "토벌자"라는 뜻으로, 도시 건설이 시작되던 시기에 하늘에 떠오른 화성을 의미했다.[76][74] 이 도시는 7세기경 아랍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유서깊은 지역 수도인 푸스타트에서 북동쪽으로 몇십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77]

이집트의 지배권은 비교적 쉽게 확립되었으며, 곧이어 970년 자우하르는 이집트에서 피신한 몇몇 이흐시드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시리아를 침공했다. 이 군대는 쿠타마 출신의 장군이었던 자파르 이븐 팔라가 이끌고 있었다. 이 침공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으며 같은 해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많은 도시들이 점령되었다. [78] 이후 자파르는 969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알레포를 쳐 떨어뜨린 다음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는데, 동쪽에서 새로운 위협이 나타나자 어쩔 수 없이 진격을 멈춰야 했다. 최근 패배한 다마스쿠스 지역 통치자들의 호소를 받아들인 바레인의 카르마트파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아랍 부족민들로 구성된 대규모 연합을 조직한 것이었다. 971년 8월, 자파르는 사막 지대에서 그들과 대결을 벌였으나 포위 작전에 패배하고 말았고, 그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79] 한 달 후, 카르마트파의 하산 알 아삼은 요르단 전역에서 새로운 지원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점령하는 데 시간을 오래 소모했고, 그 틈에 자우하르는 푸스타트와 카이로의 방어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카르마트파의 진격은 도시의 바로 북쪽에서 저지되었으며 결국 패배했다. 해상 지원을 하기 위해 도착한 칼브 지원군은 이집트에서 카르마트인들을 추방하도록 도왔다.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라믈라는 972년 5월 파티마 왕조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시리아 전선은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말았다.[80]

11세기에 건설된 알 푸스타트의 목욕탕 건축물에서 나온 벽화 조각. 오늘날 카이로 이슬람 미술 박물관 소장, 작품 번호 12880.[81][82]

이집트가 충분히 평정되고 새로운 수도가 건설되자, 자우하르는 이프리키야에 있는 알 무이즈가 이곳으로 오도록 했다. 칼리파와 그의 궁정, 재무부는 972년 가을 알 만수리야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여행했으며, 해군 역시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도중에 몇몇 주요 도시들에 들른 후, 알 무이즈는 973년 6월 10일 카이로에 도착했다.[83][84] 그 이전의 다른 왕실 수도들과 마찬가지로, 카이로는 칼리파 궁전과 공식적인 국가 모스크인 알 아즈하르 모스크를 수용하는 행정적이고 고풍스러운 대도시로 건설되었다. 988년에 건설된 또 다른 모스크는 이스마일파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중심이 되는 학술 기관이 되었다.[85] 파티마 칼리파국의 마지막 몇 년까지 이집트의 경제적인 중심지는 푸스타트였고, 그곳에는 대부분의 일반 인구가 살면서 무역 활동을 했다.[86]

파티마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레반트(요르단 전역 포함), 홍해 연안, 티하마, 헤자즈, 예멘, 심지어 가장 먼 영토인 물탄(오늘날 파키스탄)을 포함하는, 단언컨대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이 되었다.[87][88][89] 이집트는 번성했고, 파티마인들은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송나라(960~1279) 치하의 중국까지 확장된 그들의 무역과 외교 관계는 결국 중세 성기 이집트의 경제적인 방향을 결정했다. 파티마 왕조는 농업 진흥에 관심을 기울여 부를 증가시켰고, 그들과 이집트인들이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상품 작물의 재배 및 아마포 무역의 발전으로 파티마 왕조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물품들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90] 파티마 궁정 조직은 이전의 이흐시드 왕조와 아바스 왕조에 의해 구축된 관료주의적인 기반을 모방하여 설립되었다. 이흐시드 조의 지배 하에 존재했던 와지르는 파티마 왕조의 지배 하에 곧 다시 부활했다. 이 자리에 처음으로 임명된 인물은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 야쿠브 이븐 킬리스로, 979년 알 무이즈의 후계자 알 아지즈에 의해 이 자리에 올랐다. 와지르가 칼리파와 그가 통치하는 거대한 관료 국가 사이의 중개자가 됨에 따라, 그들의 직무는 수년~수십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욱 중요해져갔다.[91][92]

시리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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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of two standing soldiers. 11th century, Fatimid period, from Fustat near Cairo. Museum of Islamic Art, Cairo, inv. no. 13703.[93][94] Attribution to the Fatimid period is sometimes questioned.[95]

975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대부분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했으며, 때문에 그 지역의 이슬람 영토는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는 트리폴리 이남 지역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요안니스 1세는 최종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97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도중 사망하면서 파티마인들은 동로마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96] 한편, 튀르크계 노예 병사인 굴람ghulām 출신이자 반란에 실패하고 도망친 부와이흐 왕조아프타킨은 다마스쿠스 주민들의 추대로 그곳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시리아의 카르마트파 및 아랍 베두인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977년 봄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96] 자우하르는 다시 한번 그들의 침공을 격퇴하고 역으로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는 겨울 동안 적군에게 패배했고, 아스칼론에서 아프타킨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여야 했다. 978년 4월 그의 쿠타마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는 자우하르를 구하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었다. 이후 아프타킨과 그 휘하의 굴람 병사들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는 대신 파티마 군대에 합류하여 시리아 정복에 유용한 전력이 되어주었다.[97]

979년 이븐 킬리스가 와지르에 오른 직후부터 파티마 왕조는 전략을 바꾸었다. 이븐 킬리스는 연례적으로 공물을 바쳐 카르마트파의 침공을 막고, 자라흐바누 킬라브와 같은 그 지역의 부족들이나 왕조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옛 이흐시드 영토) 대부분을 정복할 수 있었다.[98] 쿠타마 장군 살만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려다 실패한 이후, 튀르크계 굴람 출신의 한 장군이 마침내 893년 그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것은 이들의 능력과 그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었다.[99] 이때 다마스쿠스 총독으로는 또 다른 굴람인 바이쿠르가 임명되었다. 같은 해 그는 알레포를 함락하려다 실패했지만, 대신에 유프라테스 계곡 상부(오늘날 시리아 북동부)의 락까라흐바를 정복할 수 있었다.[100] 카이로 정부는 그가 다마스쿠스의 총독으로서 인기가 너무 많다고 판단하여, 그를 결국 락까의 총독으로 좌천시켰으며, 칼리파 궁정에 있던 무니르가 다마스쿠스로 파견되었다.[99] 한편 더 북쪽에서, 알레포는 파티마 왕조가 아니라 함단 토후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99]

튀르크인들의 파티마 군대로의 편입은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파티마 왕조가 이 지역의 다른 강대국들과 군사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병력이기도 했다.[98] 파티마 왕조는 그들의 적수였던 아바스 왕조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굴람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데일람인(부와이흐 왕조 치하 이란 북부 출신의 용병들)들과 아프리카계 흑인(누비아, 즉 나일강 상류 계곡 출신)들도 모집되었다.[98] 쿠타마 전사들은 칼리파의 가장 중요한 군대로 남아있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군대에서의 인종적인 다양성의 증가는 결국 이들의 서로 다른 민족적인 구성 요소들 간의 분노와 경쟁, 그리고 갈등을 증가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98]

락까에 근거지를 둔 파티마 총독 바이쿠르는 991년 알레포를 목표로 또 다시 원정을 이끌었으나 실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했다.[101] 같은 해 이븐 킬리스가 사망했고 무니르는 바그다드와 반역적인 서신을 주고 받은 혐의로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카이로에서 강력한 반응을 촉발시켰으며, 마침내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원정을 조직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무니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체포되어 다시 카이로로 보내졌다.[102]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불가리아 제1제국과 전쟁을 벌이느라 이곳에 신경을 쓸 여념이 없었고, 함단 통치자 사드 앗 다울라 역시 991년 말에 사망했기 때문에 상황은 파티마 왕조에게 호재였다.[103] 파티마 군대의 사령관은 망구테킨이라는 튀르크계 굴람 출신 인물이었는데, 그는 오론테스 계곡을 따라 체계적으로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992년 홈스하마를 점령하고 안티오키아의 동로마-함단 연합군을 물리쳤으며, 이듬해에 샤야르를 점령하고 994년에는 알레포를 포위하기까지 했다.[103] 그러나 995년 5월, 이 소식을 들은 바실리오스 2세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강행군을 거쳐 재빠르게 이 지역에 도착하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망구테킨은 곧 포위를 풀고 다마스쿠스로 철수해야만 했다. 파티마 왕조는 새롭게 군대를 모집하고 배를 건조하여 또 다른 원정을 준비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는 그들과 협상을 통해 약 1년 동안의 평화 조약에 조인했다.[104] 996년 푸스타트 근처 나일강의 항구였던 알 마크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많은 배들이 전소되면서 원정은 더욱 지연되었으며, 마침내 그해 8월 알 아지즈가 사망하면서 알레포는 다른 문제들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105]

마그레브의 지리 토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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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leaving for Egypt, al-Mu'izz had installed Buluggin ibn Ziri, the son of Ziri bn Manad (who died in 971), as his viceroy in the Maghreb. This established a dynasty of viceroys, with the title of "amir", who ruled the region on behalf of the Fatimids.[106][107] Their authority remained disputed in the western Maghreb, where the rivalry with the Umayyads and with local Zenata leaders continued. After Jawhar's successful western expedition, the Umayyads returned to northern Morocco in 973 to reassert their authority. Buluggin launched one last expedition in 979–980 that reestablished his authority in the region temporarily, until a final decisive Umayyad intervention in 984–985 put an end to further efforts.[65][106] In 978 the caliph also gave Tripolitania to Buluggin to govern, though Zirid authority there was later replaced by the local Banu Khazrun dynasty in 1001.[108]

In 988 Buluggin's son and successor al-Mansur moved the Zirid dynasty's base from Ashir (central Algeria) to the former Fatimid capital al-Mansuriyya, cementing the status of the Zirids as more or less de facto independent rulers of Ifriqiya, while still officially maintaining their allegiance to the Fatimid caliphs. Caliph al-Aziz accepted this situation for pragmatic reasons to maintain his own formal status as universal ruler. Both dynasties exchanged gifts and the succession of new Zirid rulers to the throne was officially sanctioned by the caliph in Cairo.[109]

The reign of al-Ha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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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Continental Asia in 1000 CEAfter al-Aziz's unexpected death, his young son al-Mansur, 11 years old, was installed on the throne as al-Hakim. Hasan ibn Ammar, the leader of the Kalbid clan in Egypt, a military veteran, and one of the last remaining members of al-Mu'izz's old guard, initially became regent, but he was soon forced to flee by Barjawan, the eunuch and tutor of the young al-Hakim, who took power in his stead.[110] Barjawan stabilized the internal affairs of the empire but refrained from pursuing al-Aziz's policy of expansion towards Aleppo.[111] In the year 1000, Barjawan was assassinated by al-Hakim, who now took direct and autocratic control of the state.[112][12] His reign, which lasted until his mysterious disappearance in 1021, is the most controversial in Fatimid history. Traditional narratives have described him as either eccentric or outright insane, but more recent studies have tried to provide more measured explanations based on the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of the time.[113]

Among other things, al-Hakim was known for executing his officials when unsatisfied with them, seemingly without warning, rather than dismissing them from their posts as had been traditional practice. Many of the executions were members of the financial administration, which may mean that this was al-Hakim's way of trying to impose discipline in an institution rife with corruption.[114] He also opened the Dar al-'Ilm ("House of Knowledge"), a library for the study of the sciences, which was in line with al-Aziz's previous policy of cultivating this knowledge.[115] For the general population, he was noted for being more accessible and willing to receive petitions in person, as well as for riding out in person among the people in the streets of Fustat. On the other hand, he was also known for his capricious decrees aimed at curbing what he saw as public improprieties.[116][117] He also unsettled the plurality of Egyptian society by imposing new restrictions on Christians and Jews, particularly on the way they dressed or behaved in public. He ordered or sanctioned the destruction of a number of churches and monasteries (mostly Coptic or Melkite), which was unprecedented, and in 1009, for reasons that remain unclear, he ordered the demolition of the Church of the Holy Sephulchre in Jerusalem.[12][118]

Al-Hakim greatly expanded the recruitment of Black Africans into the army, who subsequently became another powerful faction to balance against the Kutama, Turks, and Daylamis.[119] In 1005, during his early reign, a dangerous uprising led by Abu Rakwa was successfully put down but had come within striking distance of Cairo.[120] In 1012 the leaders of the Arab Tayyi tribe occupied Ramla and proclaimed the sharif of Mecca, al-Ḥasan ibn Ja'far, as the Sunni anti-caliph, but the latter's death in 1013 led to their surrender.[12] Despite his policies against Christians and his demolition of the church in Jerusalem, al-Hakim maintained a ten-year truce with the Byzantines that began in 1001.[121] For most of his reign, Aleppo remained a buffer state that paid tribute to Constantinople. This lasted until 1017, when the Fatimid Armenian general Fatāk finally occupied Aleppo at the invitation of a local commander who had expelled the Hamdanid ghulām ruler Mansur ibn Lu'lu'.[12] After a year or two, however, Fatāk made himself effectively independent in Aleppo.[122]

The Al-Hakim Mosque in Cairo, commissioned by al-Aziz in 990 and completed by al-Hakim in 1013 (later renovated in the 1980s by the Dawoodi Bohra)[123]

Al-Hakim also alarmed his Isma'ili followers in several ways. In 1013 he announced the designation of two great-great-grandsons of al-Mahdi as two separate heirs: one, Abd al-Raḥīm ibn Ilyās, would inherit the title of caliphate as the role of political ruler, and the other, Abbās ibn Shu'ayb, would inherit the imamate or religious leadership.[12] This was a serious departure from a central purpose of the Fatimid Imam-Caliphs, which was to combine these two functions in one person.[124] In 1015 he also suddenly halted the Isma'ili doctrinal lectures of the majālis al-ḥikma ("sessions of wisdom") which had taken place regularly inside the palace.[12] In 1021, while wandering the desert outside Cairo on one of his nightly excursions, he disappeared. He was purportedly murdered, but his body was never found.[125][12]

역대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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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바이드 알라 알마디(909년 - 934년)
  2. 알카임(934년 - 946년)
  3. 알만수르(946년 - 952년)
  4. 알무이즈(952년 - 975년)
  5. 알아지즈(975년 - 996년)
  6. 알하킴 비아므르 알라(996년 - 1021년)
  7. 알자히르(1021년 - 1036년)
  8. 알무스탄시르(1036년 - 1094년)
  9. 알무스타리(1094년 - 1101년)
  10. 알아미르(1101년 - 1130년)
  11. 알하피즈(1130년 - 1149년)
  12. 알자피르(1149년 - 1154년)
  13. 알파이즈(1154년 - 1160년)
  14. 알아디드(1160년 - 1171년)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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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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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mostly hostile Sunni sources call him with the diminutive "Ubayd Allah", probably intended to be pejorative; and his dynasty is hence often called the "Ubaydid" dynasty (Banū ʿUbayd).[33][12]

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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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ftary, 1990, pp. 144–273, 615–659; Canard, "Fatimids", pp. 850–862
  2. Lascoste (1984). 《Ibn Khaldun: The Birth of History and the Past of the Third World》. Verso. 67쪽. ISBN 978-0860917892. 
  3. “Governance and Pluralism under the Fatimids (909–996 CE)”. The Institute of Ismaili Studies. 2021년 5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3월 12일에 확인함. 
  4. Nanjira, Daniel Don (2010). 《African Foreign Policy and Diplomacy from Antiquity to the 21st Century》 (영어). ABC-CLIO. 92쪽. ISBN 978-0-313-37982-6. 
  5. Fage, J. D. (1958). 《An Atlas of African History》 (영어). E. Arnold. 11쪽. 
  6. Gall, Timothy L.; Hobby, Jeneen (2009). 《Worldmark Encyclopedia of Cultures and Daily Life: Africa》 (영어). Gale. 329쪽. ISBN 978-1-4144-4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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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Julia Ashtiany; T. M. Johnstone; J. D. Latham; R. B. Serjeant; G. Rex Smith, 편집. (1990). 《Abbasid Belles Lettr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쪽. ISBN 978-0-521-24016-1. ... it was at this time that an indigenous Arabic culture was developed in Egypt, and Arab Egypt, so to speak, came of age to the extent that it was able to rival older centres like Baghdad as a seat of learning and intellectual activity. 
  9. Wintle, Justin (2003). 《History of Islam》. London: Rough Guides. 136–137쪽. ISBN 978-1-84353-018-3. 
  10. Robert, Tignor (2011). 《Worlds Together, Worlds Apart》 (영어) 3판.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Inc. 338쪽. ISBN 978-0-393-11968-8. 
  11. Brett 2017.
  12. Halm 2014.
  13. Brett 2017, 207쪽.
  14. Baer, Eva (1983). 《Metalwork in Medieval Islamic Art》. SUNY Press. xxiii쪽. ISBN 978-0791495575. In the course of the later eleventh and twelfth century, however, the Fatimid caliphate declined rapidly, and in 1171 the caliphate was dissolved and the dynasty was overthrown by Ṣalāḥ ad-Dīn, the founder of the Ayyubid dynasty. He restored Egypt as a political power, reincorporated it in the Abbasid caliphate and established Ayyubid suzerainty not only over Egypt and Syria but, as mentioned above, temporarily over northern Mesopotamia as well. 
  15. Brett 2017, 294쪽.
  16. Canard 1965, 850쪽.
  17. Dachraoui 1986, 1242–1244쪽.
  18. Madelung 1971, 1163–1164, 1167쪽.
  19. Madelung 1986, 1230–1234쪽.
  20. Madelung 1986, 1235–1237쪽.
  21. Brett 2017, 18쪽.
  22. Daftary 2007, 89쪽.
  23. Halm 1991, 27–28쪽.
  24. Daftary 2007, 89–90쪽.
  25. Daftary 2007, 90–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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