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
채수(蔡壽, 1449년 8월 25일(음력 8월 8일) ~ 1515년 12월 12일(음력 11월 8일))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인천.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1]이다. 1469년(예종 1)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 충청도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이자와 김안로는 그의 사위들이다.
생애[편집]
1468년(세조 1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2] 1470년(성종 1년)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음악에도 뛰어나 1475년(성종 6년) 성종 때 이조정랑으로서 장악원의 일까지 맡아보았다.[3]
1477년(성종 8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4]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 윤씨(廢妃尹氏)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2]
1485년(성종 16년) 비로소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5] 1488년(성종 19년)에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5]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1494년(성종 25년)에는 호조참판이 되었다.[6]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년)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2]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2]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 지지(地誌), 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5]
1703년(숙종 29년)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저서[편집]
- 《나재집》
- 《설공찬전》
- 이 소설은 1511년(중종 11년) 무렵 채수(蔡壽)가 지은 고전소설이다.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7],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8]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9] 전하지 않으며,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에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다만 어숙권의 언급[8]에서 결말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그가 나온 작품[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 나재 채수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전기 자료[편집]
- 이행, 《용재집》 권10, 인천군 채 공 묘지
- 정종로, 《입재집》 권43, 증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 제학 행 가정대부 예조참판 홍문관 제학 인천군 시 양정공 나재 채 선생 행장
각주[편집]
- ↑ 채씨 문중에서는 전통적으로 '난재'라고 명명하여 왔다. 懶의 원음은 "란"(《廣韻》落旱切《集韻》魯旱切)으로 이체자인 嬾(게으를 란)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현 중국어에서도 lǎn으로 발음한다.
- ↑ 가 나 다 라 이행, 《용재집》 권10, 인천군 채 공 묘지
- ↑ 《성종실록》 권60, 성종 6년(1475년) 10월 26일(임인) 5번째 기사
- ↑ 채수, 《나재집》 권1, 홍문관예문관합사상소(弘文館藝文館合司上疏)
- ↑ 가 나 다 《국조인물고》 권43, 연산시 이화인, 채수의 비명(남곤 지음)
- ↑ 《성종실록》 권291, 성종 25년(1494년) 6월 28일(을유) 7번째 기사
- ↑ 《중종실록》 권14, 중종 6년(1511년) 9월 2일(기유) 1번째 기사
- ↑ 가 나 어숙권, 《패관잡기》 권2
- ↑ 《중종실록》 권14, 중종 6년(1511년) 9월 5일(임자) 7번째 기사
참고 자료[편집]
- 「조선의 선비 귀신과 통하다」, 《설공찬전》, 장윤선 저, 이숲(2008년, 147~151p)
- 「조선의 문화공간」, 자천대와 숭정처사 채득기, 이종묵 저, 휴머니스트(2006년, 268~27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