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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5) 보석으로 풀려난 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5) 보석으로 풀려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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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전명운 마지막 시간으로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저격하고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 뒤 그의 일생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전명운 마지막 시간으로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저격하고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 뒤 그의 일생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에서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것은 전명운과 장인환이 사전에 저격을 공모했냐는 점입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두 사람이 분명 서로 알고 있었던 사이임에는 분명하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의거가 일어난 3월 23일 체포됐을 때 두 분이 같은 현장에 있었는데 현장에 두 분이 미리 계획을 하고 나왔는지 우연히 두 분이 만났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사실 지금도 정확하게 결정을 할 수 없어요. 여기에 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을 종합해서 봤을 때 이 두 분이 샌프란시스코에 1908년 당시에 한 100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두 분이 모를 리는 없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두 분이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장인환 의사는 대동보국회 소속의 회원이었고, 전명운 의사는 공립협회 회원이었어요. 그래서 두 분 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서로 다른 단체에서 활동을 했고 그래서 얼굴을 알고 있었고 안면이 있었다고 생각이 되지만 둘이, 두 분이서 아주 친하다던가 서로 그런 사이는 절대 아니다라는 것이죠.”

이도형 박사는 또 스티븐스 저격 과정을 봐서도 두 사람이 저격을 공모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그리고 두 분이 그런 사이기 때문에 공모했을 것이라는… 사전에. 그 전명운 의사가 먼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그리고 실패하면 장인환 의사가 나선다 이렇게 계획을 했다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전날 공동회에서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전명운 의사가 얘기를 하니까 장인환 의사도 그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 두 분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타나서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려고 먼저 총을 들었는데 총이 불발이 됐죠. 총이 망가져서 그 총으로 스티븐스를 구타하려고 얼굴을 치려고 그랬는데 그걸 보고 장인환 의사가 총을 쏜 거죠. 그래서 첫발이 전명운 의사에 맞고 두 번째, 세 번째 총알이 스티븐슨에게 맞았는데 이런 것을 봐서는 미리 공모를 했다고 하면 자기 동료인 전명운 의사를 쏠 수가 없겠죠.”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은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이 사건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인데요. 이도형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당시 샌프란시스코 의거가 일어나자마자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 두 분이 미국 경찰에 체포됐기 때문에 당연히 재판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재판에 넘어가면 재판 비용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일어났던 것이 재판, 양 의사,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재판 후원금을 거두는 문제가 논의됐고, 이 재판 후원금이 한 7천 달러 정도가 모여졌는데 이 7천 달러를 모으기 위해서 미주한인사회가 전부 다 푼돈을 1달러, 50센트, 뭐 많이 낸 사람들은 10달러를 냄으로써 한인사회가 이 두 의거로 인해 가지고 하나의, 흩어져 있던 한인사회가 하나로 결집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탄생한 게 1909년 2월의 국민회로 미주에 있는 공립협회와 하와이에 있는 한인협성협회가 하나로 합해서 국민회로 통합이 되는 최초로 미주한인 사회가 통합이 됐고, 그다음에 1910년에 인제 대동보국회까지 합쳐가지고 대한인국민회로 탄생을 하게 됩니다.”

다음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이도형 박사는 말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또 대외적으로는 이 샌프란시스코 의거가 인제 미국 언론에 밝혀지는데 아니 왜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을 죽였을까에 대한 그런 문제들이, 미국 사람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미국 주요 언론에 계속 보도가 되는데 이 사람이 장인환이라는 사람, 전명운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 스티븐스를 사살하게 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뭐냐. 이 스티븐스라는 미국 사람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크게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로써 두 사람이 스티븐스에게 총을 쏘게 됐고, 결국 스티븐스가 사망하게 됐는데, 그런 것으로 해서 대외적으로는 미국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의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고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고 그런 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렸다는 점에서 대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은 스티븐스 저격 사건의 공판을 이용하여 한국 식민지지배의 정당성을 미주 지역에 선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전명운의 석방으로 좌절됐습니다.

일본은 장인환을 법정 최고형을 받게 진력하는 한편 전명운을 처단의 주모자로 재수감시키려는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 한인 공회는 전명운을 일단 연해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전명운은 1908년 8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뉴욕으로 가서 대서양을 건너 베를린-모스크바를 거쳐 연해주로 향했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전명운이 연해주에서 공립협회 지회를 설치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이제 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동부로 가서, 1908년 8월경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제 동부로 가서 뉴욕에서 유럽을 횡단해서 10월 6, 7일경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을 하는데 거기서 인제 이치원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머물렀어요. 그런데 여기서 머물면서 러시아에 왔으니까 러시아어도 배우고 그다음에 이제 전명운 의사가 공식적으로 연해주에 갈 때 공립협회의 특파원으로 가는 명칭으로 갔어요. 그래서 연해주 지역 공립협회 지회들을 설치하는 활동을 주로 했고, 그다음에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는 의병 운동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단체가 동의회라는 단체인데 거기에는 안중근 의사가 참여하고 있는 단체에요. 그 동의회에 참석해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활동을 했고, 안중근 의사도 전명운하고 자료에 의하면 서너 차례 만났다고 해요. 그다음에 거기에 있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가 당시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김원구, 송진원, 홍성국 3명의 유학생들을 데리고 다시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유럽을 거쳐 영국으로 해가지고 다시 뉴욕으로 미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전명운이 미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먼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전명운이 고초를 겪을 것으로 우려해 미국행을 권유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연해주 지역에서의 생활고도 전명운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미국에 돌아온 뒤 전명운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는 등 가끔 대외활동을 하기도 했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전명운이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이분이 이제 일상으로 돌아갔죠. 일상으로 돌아가서 국민회 활동에 충실했고 대부분의 초기 이민자들이 그런 것처럼 노동으로 생활을 대부분 하잖아요. 그 와이오밍주에서 철도부설 공사장에서도 일하고 뉴욕에서는 과자점도 했고 그리고 서부로 와서 캘리포니아 농장지대의 맨티카에서 세탁업도 했고 윌로스에서 여관업도 했고 아무튼 그냥 평범한 이민자와 같이 생활했지만, 당시 가장 큰 단체가 국민회였기 때문에 국민회에 충실해서 맨티카 지방 회장으로도 선출되고 윌로스 지방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그렇게 활동했는데,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계속 불운이 겹쳤어요. 1929년에는 큰아들이 13세에 스키장에서 사망을 하고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한 달 후에 부인을 사망을 하고, 그런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회 활동을 했고 1942년에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에 이른바 맹호군에도 참석을 하고 당시 나이가 58세로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인경위대에 참석하다가 44년에 회갑을 맞았고 47년 11월 18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전명운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했습니다. 또 1994년 4월 8일 고인의 유해는 고국을 떠난 지 90여 년 만에 한국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전명운이 항상 애국심을 품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전명운이란 분은 굉장히 풍운아적인 삶을 살았어요. 미국에 온 것부터 해가지고 이런 의거에 참가하고 그다음에 평생을 미국에 살면서 그런 풍운아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의 인생에 가장 정점이 되는 것은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그런 인제 의거에 참석하게 되는 것인데 전명운 의사의 이 의거는 단순히 한 사람이 애국심으로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미국에 있는 한인들의 독립의식을 이끌어서 독립운동 대열에 이끌게 하고 또 이것이 사실상 미국 독립운동의 시발점을 마련한 그런 큰 계기가 됐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에서는 미주한인사에서는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가 가지는 의미가 상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평범하고… 이분의 생활은 굉장히 평범한 것 같지만 생각에 가슴 속에 늘 굉장한 애국심을 품고 있었던 그런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전명운 마지막 시간으로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저격하고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 뒤 그의 일생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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