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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7) 이승만과의 대립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7) 이승만과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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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마지막 시간으로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과 박용만이 미주 한인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마지막 시간으로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과 박용만이 미주 한인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2년 11월 20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 선포식을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발표된 선포문은 박용만이 기초했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한국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 “그러니까 사실상 보면 이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선포한다는 의미는 땅은 없지만, 임시정부로서의 권한을 갖는.. 물론 임시정부로서의 발전이 형태상으로 되지는 않는데 그 구상 속에는 사실상의 정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자는 그런 의미가 바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에 담겨 있는 겁니다.”

김도훈 교수는 또 그의 저서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선포문은 근왕주의를 청산하고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표명한 최초의 선언으로, 개항 이래 추진되어 왔던 근대국가 수립 노력이 이때 와서 맺음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습니다

박용만은1912년 12월 하와이로 옮겨갔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기관지인 ‘국민보’의 주필이 됐고, 북미 대륙에 있을 당시 주장하던 의무금제도와 자치제도를 하와이에서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박용만은 국민개병을 통한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농장을 구입하여 1914년 6월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활동하던 박용만은 1913년 갈 곳 없어 방황하던 이승만을 교육과 출판 사업에 힘써 달라며 그를 하와이로 초청했습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당시 박용만과 이승만이 의형제를 맺을 만큼 친밀한 사이였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사실 이승만과 박용만은 의형제에요. 그러니까 한말에 1904년에 박용만이 투옥됐을 때 그 감옥에서 이승만과 정순만과 박용만이 의형제를 맺어요. 그래서 독립운동계에서는 박용만의 ‘만’자, 이승만의 ‘만’자, 정순만의 ‘만’자를 따서 ‘3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1904년에 이승만이 먼저 미국으로 가고, 그다음에 뒤를 따라가는 게 박용만 선생인데 1905년 2월에 가 거든요? 바로 이때 그들의 끈끈한 관계를 볼 수 있는 게 뭐냐하면 이때 박용만 선생이 미국에 갈 때 이승만의 아들과 정순만의 아들을 데리고 가요. 그래서 이때 가면서도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 때 쓴 ‘독립정신’이라는 책의 원고가 있었는데 이것도 몰래 숨겨서 나중에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라는 책이 빛을 보게 될 정도로 끈끈해요.”

그러나 이승만의 하와이 초빙은 박용만에게 치명적인 아픔을 안겨주는 시초가 됐습니다.

하와이에 온 이승만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박용만에 대한 음해공작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이승만은 1915년과 1918년 하와이 한인사회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박용만 지지 세력과 부딪혔습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이와 관련해 1915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이승만이 1915년과 18년 두 차례 하와이를 장악하기 위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러니까 ‘재정을 쓰는 것이 문제다”라는 그런 식이죠. 왜냐하면 당시 재정이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계획했던 군사학교라던가 이런데 중심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그런데 대한 일종의 음모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때 1915년에 하와이 지방총회가 재정을 함부로 쓴다고 해가지고 문제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서 이승만은 자기를 따르는 임원들을 중심으로 총회를 장악해 버려요. 이때 안창호 선생이 하와이로 넘어가서 중재를 하기도 하는데 제대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이 쪽에서 국민회 회원이 급감하고 재정수입이 3분의 1까지 떨어져요.”

그런데 이승만의 박용만 제거 공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 세력은 1918년 들어 다시 박용만 측을 공격하는데요.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1918년을 기점으로 박용만과 이승만 사이 관계가 완전하게 단절된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이승만이 1915년에 정권을 장악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1918년에 이승만이 돈을 다 본인이 관리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게 돈을 유용하면 혐의가 있어가지고 나중에 박용만 쪽 지지자들이 이걸 법정에 고발해버리는데, 이때 폭력 사태가 양쪽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생겨요. 이렇게 되다 보니까 이때부터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관계는 의형제에서 완전히 정적으로 대립하는 그런 관계가 됩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결별한 박용만은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대일 무장투쟁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진력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독립군 결성에 관여했고 만주 군사단체들을 지도할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군사통일회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또 박용만은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군자금 마련과 기지 확보에도 주력했습니다.

1927년 박용만은 3편의 논문이 실린 책을 출판했는데, 그 내용은 모두 만주가 옛 강토였음을 주장한 것으로서 박용만이 만주에 또 하나의 조선을 건설하고자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박용만의 꿈은 1928년 10월 마감됐습니다. 이달 박용만은 의열단 이해명에게 중국 베이징에서 일제 스파이라는 명분으로 피살됐습니다.

박용만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안형주 씨는 박용만이 초기 미주한인사회의 개척자였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초기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로서의 특징은 초기 미주한인 사회를 개척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현지 경제, 사회 상황을 파악하고 한인들이 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여 동업자들과 합자하여 사업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는 한인들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고 지방단체를 조직하고 해외동포 사회를 독립운동기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안형주 씨는 또 박용만이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사설과 책자로 실천한 지도자였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그는 긴 안목으로 임시정부의 모체인 무형국가론을 재미한인 신문에 기재하여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1911년에 국민개병설, 1912년에 군인수칙, 그리고 1915년에 아메리카 혁명이라는 책자를 발행했습니다. 그의 글들은 결코 일본에 굴하지 않고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형주 씨는 박용만이 재미 한인사회 지도자들을 대거 양성했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박용만은 소년병학교에서 백일규, 김용국, 홍성국, 정환경, 유일한, 구영숙, 정양필, 김영성을, 그리고 하와이 국민군단에서 이원순을 양성했습니다. 박용만은 초기 한인사회 지도자들,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중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독립운동과 한인 정체성을 가르치기 위한 민족 운동을 실현한 선각자였습니다.”

한편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박용만이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장기간 덜 알려진 상태였고 그에 관한 연구도 미진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사실상 박용만 선생이 이승만이나 안창호 선생에 비해서 그렇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죠? 첫째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1928년에 피살당하면서 거의 잊힌 인물이 됐다고 보죠. 박용만 선생이 포상받은 게 2005년도에요. 그러니까 박용만 선생에 대해서 사실상 어떤 연구도 그간 없었죠. 그래서 그런 아쉬움은 있어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마지막 시간으로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과 박용만이 미주 한인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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