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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20세기 가장 위대한 조경사, 프레드릭 로우 옴스테드


[인물 아메리카] 20세기 가장 위대한 조경사, 프레드릭 로우 옴스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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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 시 경계선 안에 사는 인구만 2023년 기준 약 834만명에 달합니다. 도시의 중심인 맨하탄에는 수십층의 고층건물이 밀림처럼 들어서 있고, 차량과 인파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크고 복잡한 도시지만 그 한 복판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넓고 푸른 공원이 자리잡고 있어 시민들의 머리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 시 경계선 안에 사는 인구만 2023년 기준 약 834만명에 달합니다. 도시의 중심인 맨하탄에는 수십층의 고층건물이 밀림처럼 들어서 있고, 차량과 인파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크고 복잡한 도시지만 그 한 복판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넓고 푸른 공원이 자리잡고 있어 시민들의 머리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외도 아니고 도시 중의 도시인 맨하튼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공원은 바로 센트럴 파크입니다 .

서울 여의도 면적의 약 절반에 가까운 크기인 이 공원에는 중심부의 대형 잔디 광장, 동물원, 폭포, 호수 등이 있으며, 연간 방문객 수는 4천 200만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센트럴 파크는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 오염된 공기를 정화해주고, 기후를 완화해주며,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이 공원을 설계한 인물은20세기 가장 위대한 조경사로 불리우는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입니다.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역설한 옴스테드는 일찍부터 도심지 휴식 공간의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옴스테드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로부터 시작해 미국 내의 수 많은 도시 공원을 건설한 이정표적인 조경사였습니다. 옴스테드는 또한 언론인, 사회 비평가, 공공 행정가이기도 했습니다.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는 1822년 미국 동북부 코네티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옴스테드는 부유한 상인으로, 자연과 인간, 명승지를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옴스테드는 14세때

예일 칼레지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도중 눈에 심한 옷나무 독이 올라 시력에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정상적인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옴스테드는 지형 엔지니어 견습공, 상인, 저널리스트 수련생 등 여러 분야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장차 평생 전문 분야인 조경설계사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소중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20세로 접어들면서 점차 시력이 개선되자 옴스테드는 예일 대학교에서 과학과 공학 강좌를 들었습니다. 그는 한때 과학적 농사법을 사용하는 농업에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도 깊었던 옴스테드는 당시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인사였습니다. 영향력 있는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그런 옴스테드에게 미국 남부를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옴스테드는 그 청을 받아들여 1852년부터 1855년까지 매주 한차례씩 그곳의 농업방식, 노예제, 노예제도가 남부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보도했습니다. 그 기사로 옴스테드는 저널리스트로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또 그가 1861년에 목화의 왕국 The Cotton Kingdom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저서는 남북전쟁 이전 남부의 상황을 말해주는 가장 객관적인 해설서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옴스테드는 휴가 때면 유럽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특히 잘 조성된 영국의 조경에 깊이 매료됐습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바를 ‘어느 미국 농부의 영국 여행기’ (Walks and Talks of an American Farmer in England)라는 저서에 담았습니다.

옴스테드가 신문에 글을 쓰던 무렵인 1857년 뉴욕 시는 센트럴 파크 건설업자를 뽑기 위해 공개경쟁을 실시했습니다. 옴스테드는 젊은 영국 태생 건축가 ‘칼버트 복스’와 팀을 이루어 프로젝트 설계를 제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넓은 잔디밭을 중심으로 풍부한 식재와 목가적 풍경을 갖춘 동시에 도시와 이용자의 필요를 잘 수용하도록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지면 아래로 낮추어진 횡단 도로를 내 도시 교통을 고려하면서도 공원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32개 팀과의 경쟁에서 이겨 사업권을 따냈습니다. 옴스테드는 센트럴파크의 감독관 (superintendent)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1861년까지 그는 도시 공원의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예술을 점목시키는 미국 최초의 프로젝트에 혼신의 정렬을

기울였습니다. 센트럴파크는 옴스테드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이었습니다. 이 공사에는 여러 나라의 엔지니어, 정원사, 석공, 인부 등 2만여 명이 동원됐습니다.

공원의 도로를 내기 위해 바위를 깨뜨리는데는 남북전쟁 시 최대의 격전중 하나인 게티스버그 전투 때보다 더 많은 화약이 사용됐습니다. 19세기 뉴욕의 공공 프로젝트 중 센트럴 파크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습니다.

옴스테드는 1865년 이후 30년 동안 전업 조경가로 활동했습니다. 옴스테드와 복스 두 사람은 ‘옴스테드, 복스 앤드 컴퍼니(Olmsted, Vaux & Co.)’라는 회사를 출범하고 1872년까지 함께 일했습니다. 뉴욕시의 성공적인 도시공원 건설은 이후 미국 여러 곳의 자연공원 조성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중 일부의 예는 뉴욕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파크, 필라델피아의 페어몬트 파크, 뉴욕 시의 리버사이드 파크와 모닝사이드 팍, 디트로이트의 벨 아이슬 팍, 워싱턴 디시의 국회의사당 주변 조경,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포드 대학 조경 등이 있습니다.

1864년에서 1890년까지 옴스테드는 첫 요세미티 공원 계회 위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만들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의 이 일대를 영구적인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일대의 공원 조성사업도 지휘했습니다. 1886년 이후 옴스테드는 주로 보스톤 시와 매사츄세츠 주 브루클린 시의 여러 공원과 명승지 도로망 설계, 보스톤 항 일대 개선 계획 마련에 집중했습니다.

1880년대말 시카고 시는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를 추진하면서 옴스테드를 조경 프로젝트의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박람회가 끝난 후 옴스테드는 이곳을 시카고의 인기있는 ‘잭슨 공원’으로 재 설계했습니다.

옴스테드는 1895년 현업에서 물러나고, 그의 두 아들인 존 찰스 옴스테드(John Charles Olmsted)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주니어(Frederick Law Olmsted Jr.)가 옴스테드 브라더스(Olmsted Brothers)라는 회사 이름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미국조경가협회(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s)와 하버드 대학교 조경 프로그램도 설립했습니다.

옴스테드가 세운 회사는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전역에서 공원, 주거 단지, 대학 캠퍼스, 국립공원, 도시계획 등 500여 건의 작업을 수행했고 6,000여 건의 보고서와 서신을 남겼습니다.

옴스테드의 조경에는 7가지의 S라는 디자인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S는 Scenery, 즉 멋진 경관입니다. 두번째는 Suitability, 적합성입니다. 지형과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Style. 독특한 성격이 있는 조경입니다. 목가적이라든가, 그림 같다든가 하는 특유의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Subordination, 주된 존재와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종속적 요소들로 구성돼야 하는 것. 다섯번째Separation, 분리입니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갖는 존재들은 분리시킴으로서 개별 대상에 대한 집중도를 분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여섯번 째 Sanitation. 위생입니다. 청결, 하수 처리 시스템 완비 등 보건 위생 시설을 갖추어야 합니다.

일곱번째 Service. 도시 공원은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정신과 신체의 웰빙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해 줄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옴스테드는 몸이 쇠약해 73세때인 1895년 일에서 손을 떼고 매사츄세츠 주에서 노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1903년 그곳에 있는 McLean 병원에서 입원생활을 하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병원도 옴스테드 자신이 설계도를 만들어준 곳이었습니다. 그가 타계한 후 미국 여러 곳에는 옴스테드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 건물 등이 등장했습니다. 동부의 명문 하트포드 대학은 학생회관 명칭을 옴스테드 홀로 명명했습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옴스테드 포인트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가 살았던 던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의 저택은 국가 유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돼 있습니다.

오늘날 그 아들들이 설립한 조경재단(Landscape Architecture Foundation)은 옴스테드의 이름으로 매년 장학생을 선정하며 그의 역사와 유산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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